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모든 철학자는 현대의 인간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것을 분석함으로써 목표에 이르려는 공통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무의식중에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영원한 진리이며, 온갖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변하는 존재, 사물의 정확한 척도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역사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 절대적 진리가 없는 것과 마친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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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고 있는 루이스 멈퍼드의 『기술과 문명』이 쓰여진 것은 1934년이다. 읽으면서 자꾸만 1964년에 쓰인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가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일까? 읽어 나갈수록, 기술 혹은 기계에 대해서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첨단이라는 말, 고도라는 말을 (아무 데나) 서슴없이 쓸 만큼 기술적으로 높은 단계인 듯한 요즘, 이상하게도 기계는 그냥 잘 모르는 것, 다루기 어려운 것, 나랑 상관 없는 것이 되고 기술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같은 개별 상품으로 대변 혹은 상징되면서 그 맥락과 결들이 심각하게 축소된다. 이상하다. 기술이 삶으로 들어올수록, 그 거리감이 없어질수록 그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가다니. 니체가 말한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역사 감각의 결여)을 내 식으로 이해하자면, 거리 감각의 결여이기도 하다.
몸 쓰는 법을 배우면서, 상대를 공격하는 법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이 거리감이다. 혼자서 거울을 보고 팔을 뻗고, 발을 움직이면서 연습을 하다가 실제로 사람과 대련을 하게 되면 어느새 몸은 연습한 것을 다 까먹고 맥없이 휘청인다. 실재하는 상대와의 거리에 대한 감각을 갖지 않으면 대련은 무의미하다. 나 역시 초보자이지만, 나와 비슷하게 무술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면 꽤 재미가 있는데, 유독 몸을 쓸 줄 모르는 사람, 유독 대련을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거칠게 찾아보자면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socially awkward하달까,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몸의 동작을 주고받는 게 어려운 만큼, 이런 사람들은 말을 주고받는 것도 어려워한다. 이 정도의 '사이'에서 어느 범위의 말까지 할 수 있을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리액션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사람들은 정말 전혀, 감이 없어 보인다.
이 거리감의 결여는 자신에 대한 거리감도 포함한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맥락을 조망하는 힘이 없는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페이스북 친구나 댓글이 아니라 니체 식으로 말해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다. 관계 속에서 전체 속에서 철학하고 사유해야 한다. 멈퍼드의 관점에서 "인간은 시간의 지속이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특정한 인간형을 만들어 내고 이에 걸맞은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재앙의 근원이자 희망의 원천이라는 이중의 가능성을 지닌다. 인간은 스스로를 절망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이끌 수 있을뿐더러, 이 구렁텅이에서 희망을 일궈낼 수도 있는 존재"(『기술과 문명』옮긴이 해제 중에서)라는 말은 다소 뻔하게 들릴 수 있지만, 기술의 고도화되면 될수록 지금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이 발명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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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힘들다는 사람들을 볼 때, 케케묵은 어린시절 상처들을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그들에게 '거리감'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보는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觀點은 중요하다. 내 삶과 핸드폰이, 내 삶과 컴퓨터가, 내 삶과 돈이, 내 삶과 직장이, 내 삶과 가족이, 내 삶과 연인이, 내 삶과 사회와 어떻게 관계맺고 상호작용하는지, 이들은 어떻게 서로 외부를 내면화하고 내부를 외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 '보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하루는 달라질 것이다. 눈 뜨자마자, 눈 감을 때까지 손에서 떼지 않는 스마트폰과 매일매일 학교에서 혹은 직장에서 보게 되는 짜증나는 동료들과 나와의 관계가 달라질 것이고 대화라고는 불가능한 가족과의 관계가 달라질 것이고 돈이 없어서 짜증났던 내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나에 대한 역사 감각을 갖는 일, 나와 외부에 대해 새롭게 감각하는 일—이것으로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아직 다 읽기 전이라 뭐라 말하기는 그렇지만서도 현재까지 읽은 바로 『기술과 문명』을 통해서 내가 느끼(고 있)는 점은, 외부를, 사건을, 사회를, 나와 상관있는 일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것— 자본과 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살려면 말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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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고 있는 루이스 멈퍼드의 『기술과 문명』이 쓰여진 것은 1934년이다. 읽으면서 자꾸만 1964년에 쓰인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가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일까? 읽어 나갈수록, 기술 혹은 기계에 대해서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첨단이라는 말, 고도라는 말을 (아무 데나) 서슴없이 쓸 만큼 기술적으로 높은 단계인 듯한 요즘, 이상하게도 기계는 그냥 잘 모르는 것, 다루기 어려운 것, 나랑 상관 없는 것이 되고 기술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같은 개별 상품으로 대변 혹은 상징되면서 그 맥락과 결들이 심각하게 축소된다. 이상하다. 기술이 삶으로 들어올수록, 그 거리감이 없어질수록 그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가다니. 니체가 말한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역사 감각의 결여)을 내 식으로 이해하자면, 거리 감각의 결여이기도 하다.
몸 쓰는 법을 배우면서, 상대를 공격하는 법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이 거리감이다. 혼자서 거울을 보고 팔을 뻗고, 발을 움직이면서 연습을 하다가 실제로 사람과 대련을 하게 되면 어느새 몸은 연습한 것을 다 까먹고 맥없이 휘청인다. 실재하는 상대와의 거리에 대한 감각을 갖지 않으면 대련은 무의미하다. 나 역시 초보자이지만, 나와 비슷하게 무술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면 꽤 재미가 있는데, 유독 몸을 쓸 줄 모르는 사람, 유독 대련을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거칠게 찾아보자면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socially awkward하달까,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몸의 동작을 주고받는 게 어려운 만큼, 이런 사람들은 말을 주고받는 것도 어려워한다. 이 정도의 '사이'에서 어느 범위의 말까지 할 수 있을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리액션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사람들은 정말 전혀, 감이 없어 보인다.
이 거리감의 결여는 자신에 대한 거리감도 포함한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맥락을 조망하는 힘이 없는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페이스북 친구나 댓글이 아니라 니체 식으로 말해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다. 관계 속에서 전체 속에서 철학하고 사유해야 한다. 멈퍼드의 관점에서 "인간은 시간의 지속이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특정한 인간형을 만들어 내고 이에 걸맞은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재앙의 근원이자 희망의 원천이라는 이중의 가능성을 지닌다. 인간은 스스로를 절망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이끌 수 있을뿐더러, 이 구렁텅이에서 희망을 일궈낼 수도 있는 존재"(『기술과 문명』옮긴이 해제 중에서)라는 말은 다소 뻔하게 들릴 수 있지만, 기술의 고도화되면 될수록 지금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이 발명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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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힘들다는 사람들을 볼 때, 케케묵은 어린시절 상처들을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그들에게 '거리감'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보는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觀點은 중요하다. 내 삶과 핸드폰이, 내 삶과 컴퓨터가, 내 삶과 돈이, 내 삶과 직장이, 내 삶과 가족이, 내 삶과 연인이, 내 삶과 사회와 어떻게 관계맺고 상호작용하는지, 이들은 어떻게 서로 외부를 내면화하고 내부를 외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 '보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하루는 달라질 것이다. 눈 뜨자마자, 눈 감을 때까지 손에서 떼지 않는 스마트폰과 매일매일 학교에서 혹은 직장에서 보게 되는 짜증나는 동료들과 나와의 관계가 달라질 것이고 대화라고는 불가능한 가족과의 관계가 달라질 것이고 돈이 없어서 짜증났던 내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나에 대한 역사 감각을 갖는 일, 나와 외부에 대해 새롭게 감각하는 일—이것으로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아직 다 읽기 전이라 뭐라 말하기는 그렇지만서도 현재까지 읽은 바로 『기술과 문명』을 통해서 내가 느끼(고 있)는 점은, 외부를, 사건을, 사회를, 나와 상관있는 일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것— 자본과 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살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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